역사 문제 풀이좀 도와주세요ㅠㅠㅠ 고교학점제 미이수 걸려서 이거 풀어야되는데 모르겠어요ㅜㅠㅠ 오늘까지 제출인데 좀 도와주세요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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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의 성립은 1170년(명종 원년) 정중부(鄭仲夫) 등에 의한 무신정변에서 비롯되었음
고려 전기 사회가 문벌 귀족들에 의한 문신 중심의 정치가 행해져 상대적으로 무신들에 대한 차별 대우가 극에 달했다는점
제도적으로도 무반은 정3품직인 상장군(上將軍)을 최고 관직으로 했고, 2품 이상인 재상(宰相) 직에는 올라갈 수 없었다. 따라서 재상은 문신이 독점하게 되었으며, 일반 하층 군인들의 불만도 무신정변의 원인의 하나였다.
이들은 전시에는 물론 평상시에도 공역(工役)에 동원되었으며, 심지어는 군인전(軍人田)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자 불만이 극대화
무신들에 대한 외면적인 멸시와 천대에도 불구하고, 무신들의 실제적인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도 중요한 원인의 하나
이와 더불어 비대해진 문신 세력과 국왕 간의 권력에 대한 갈등과 마찰이 정변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도 지적되고 있음
이러한 여러 요소들은 문신 중심의 정치를 구현해왔던 고려 전기 사회를 붕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고려사회는 무신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무신들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정권이 성립되었습니다 이를무신정권 이라 합니다
왕건은 송악지방의 호족으로 궁예 휘하 무장들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고 그들로부터 추대받아 고려의 국왕이 되었다. 고려 건국초에는 지방에 독립적인 호족세력이 군림하고 있었다. 태조 왕건은 지방호족을 포섭하여 신라말의 사회혼란을 수습하여 갔으며 신라의 비부를 받아들이고 후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호족은 고려를 세운 주역으로 광종의 왕권 강화 정책으로 세력이 약해지면서 문벌 귀족화되었음.
ⓐ 문벌귀족이란 고려를 세운 6두품과 호족들이 중앙에 진출하여 서로 결혼을 하여 거대한 가문을 이루고 관직을 독점하며 각종 특권을 누리게 된 사람들을 뜻합니다 .
ⓑ 성종대부터 시작되어 문종대에 이르기까지 고려의 문물제도가 정비되고 중앙집권적인 통치질서가 완비되었다. 이와함께 고려의 정치를 주도하고 사회를 운영해가는 문벌귀족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정치·경제·사회·문호의 주인공이 도어 모든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사회를 문벌귀족사회라고 한다. 그러나 문벌귀족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는 이자겸 묘청의 란으로 그 모순이 노정되었으며 무신란을 계기로 붕괴되어 갔다. 정치적으로는 음서제도(5품이상 관료의 자제 중 1명은 과거를 치지 않고 관리가 될 수 있는 것), 경제적으로는 공음전(5품 이상 관리에게 특별히 주는 세습 가능한 토지)을 갖게 되고, 서로 중첩된 혼인관계 유지하면서 왕실과 혼인관계 열망하였으나 무신정변으로 몰락.
100여 년간 계속된 무인정권은 내부의 분열과 몽고의 침입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때 무인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대몽항쟁하였으나 집요한 몽고의 침입에 굴복.
- 최충헌은 최고 권력 기관으로 교정도감을 설치하였다.
- 도방과 삼별초를 만들어 정권 유지의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 최우는 정방을 만들어 문무관의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 최우는 도한 서방을 만들어 무신 정변 이후 축출된 문신들을 다시 등용하였다.
ⓐ 권문세족의 출신 성분은 과거의 문벌귀족, 무신, 혹은 원의 세력을 등에 업고 갑자기 출세한 통역관, 대상인 등등 다양하다.
ⓑ 원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권문세족이 지배층으로 대두하였다. 그들은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삼아 정계의 요직을 장악하고 농장을 소유히였다. 음서로서 신분을 유지하고, 광범위한 농장을 소유 한 후 몰락농민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 권문세족의 특징은 보수적, 고위 관직을 독점 (첨의부, 밀직사, 도평의사사의 구성원으로 권력 장악), 과거제도 보다 음서제를 활용하여 관직에 나아가고, 친원적 성향, 친 불교적 성향, 불법적 토지 겸병으로 대토지를 소유(대 지주)하여 국가 재정의 약화를 가져왔다.
ⓐ 무신 집권기 최우가 설치한 '서방'을 통해 등장하였고 공민왕 때 '권문세족'을 누르기 위해 공민왕이 정책적으로 등용하면서 성장하였다. 경제력을 토대로 과거를 통해 정계를 진출한 세력으로 권문세족과 대립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지지하여 보수적인 권문세족에 대립하여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이들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어 조선양반사회의 토대가 되었다. 그들은 전시과 붕괴로 사전 폐단 지적하고, 구질서와 사회 모순을 비판하고 전반적 사회개혁과 문화혁신 추구하였다. 신진사대부는 온건 세력과 급진세력으로 나누어지는데 조선건국을 도운 급진세력이 조선의 지배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원간섭기(元干涉期)는 고려의 대몽항쟁(對蒙抗爭)이 끝나고 원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반원운동에 성공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을 때까지이므로 일반적으로는 1259년부터 1356년까지 97년간
원간섭기에 고려는 왕조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원의 간섭을 받게 되어 자주성(自主性)이 크게 훼손되었다.
우선, 고려 영토 안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동녕부(東寧府),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 등 원의 지방관청이 설치됨
3성(三省)-6부(六部) 체제에서 첨의부(僉議府)-4사(四司) 체제로 격하되었으며
원의 여러 전쟁에 필요한 군대와 각종 물자를 제공하게 되었으며, 공물(貢物)과 공녀(貢女)·엄인(閹人) 등을 원에 보내게 됨으로써 일반 민들이 커다란 피해
전통적 고려 군사체제인 2군6위는 몽골의 노역 사역에 징발 당하는수모를 당하기도하였으며 급료나 군인전은 전혀 없고 고려가 급식만 제공하는 완전 군사체제의 붕괴
조선 시대 왕에 대한 간쟁(諫諍)·논박(論駁)을 임무로 하는 기관
식년시(式年試) - 3년마다 한 번씩 정기적으로 시행
두번째 프린트는 옆으로 올려 보기 힘들어 못함